개요

3·10 총파업은 1947년 3월 1일의 3·1발포사건에 대한 제주도의 가장 광범위한 시민 저항으로, 제주도 전체의 90% 이상의 직장이 참여한 대규모 집단 행동이었다. 이 사건은 미군정에 대한 제주 주민들의 저항 의식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며, 이후 4·3사건으로 이어지는 갈등의 중요한 과정으로 평가된다.

규모와 참여

참여 부문

  • 산업체: 개인소유·군정 운영 공장 관계자 및 노무자 전원
  • 운송: 모든 운송업체 관리자 및 노무자
  • 교육: 모든 학교의 교사 및 학생
  • 군정직원: 약 75-90% (보고서에 따라 60-90% 범위)
  • 금융: 금융 기관의 부분적 마비
  • 통신·교통: 제주도 전역의 통신 및 교통 서비스 부분 중단
  • 식량배급: 배급 시스템 부분 마비

참여 규모 평가

  • 미군정 보고서: 제주도 전체 직장의 95% 이상 참여
  • 진상조사위원회 보고서: 제주도 전체 직장의 95% 이상 참여
  • 특이점: 좌익 및 우익 세력 모두가 동시에 참여하여 이념 초월적 저항 양상을 보임

발생 원인

직접적 원인: 3·1 발포사건

3월 1일 경찰의 과도한 폭력 사용으로 인한 주민들의 증오심이 3·10 총파업의 직접적 원인이었다.

미군정 G-2 정보부 보고서에 따르면: “총파업의 이유는 각양각색이지만, 좀 더 근본적인 이유는 3월 1일 폭동 당시 경찰의 행동에 대한 증오심 때문이다.”

구조적 배경

주한미군사령관에서 극동군사령관으로 보낸 전문(3월 15일자)에서는: “남로당이 선동한 것으로 간주되는 주민의 반경찰적 경향”

이는 좌익 정치 조직의 역할을 지적하면서도, 핵심은 주민들의 스스로의 반경찰 감정이었음을 시사한다.

주민 요구사항

총파업 주도자들은 과도입법의원 강순 의원이 낭독한 5개 항의 요구사항을 제시했다:

  1. 민간인 살해 경찰의 교수형 (사형)
  2. 경찰 무장해제
  3. 경찰서장의 사임
  4. 경찰의 야만적 행위 중단
  5. 모든 친일경찰의 제거
  6. 피해자 가족에 대한 보상

이 요구사항들은 경찰의 과도한 폭력, 친일 경력자의 계속된 권력 행사, 그리고 식민지 시대 경찰 체계의 근본적 개혁을 촉구하는 것이었다.

미군정의 대응

병력 증강

3월 10일 총파업에 대응하여 미군정은:

  • 응원경찰 약 400명 파견 (기존 300명에 추가 배치)
  • 이는 전체 경찰 병력을 급격히 증가시킴

타임라인

3월 15일: 주한미군사령관이 극동군사령관에게 전문

  • “총파업 여전히 진행 중”
  • “폭력행위 보고 없음”
  • 이는 도시 전체 파업이 비폭력적으로 진행되었음을 나타냄

3월 17일 이후: 복귀 시작

  • 군정직원 90% 복귀
  • 운수업체 50% 복귀
  • 여전히 상당한 규모의 저항이 지속됨

당국의 평가

도지사의 입장:

  • “파업이 불공정하며 동조적이지 않다”
  • 이는 당국이 파업의 정당성을 부인하려는 시도

탄원서 조사 결과:

  • “극좌분자”로 판정
  • 좌익 세력의 배후 기획설 제기

후속 사건: 3월 19일 중문 유치장 사건

3월 19일, 3·10 총파업의 여파로 약 1,000명의 주민이 중문 유치장에 모여 구금된 죄수들의 석방을 요구했다. 경찰이 발포하여 4명이 부상당했다.

이 사건은 3·10 총파업 이후도 제주 주민들의 경찰에 대한 저항이 계속되었음을 보여준다.

역사적 의미

이념 초월적 저항

3·10 총파업의 가장 주목할 만한 특징은 좌익과 우익이 함께 참여했다는 점이다. 이는 3·1 발포사건으로 인한 피해가 정치 진영을 초월한 공동의 치욕으로 인식되었음을 의미한다.

4·3사건으로의 경로

3·10 총파업은:

  • 제주 주민들의 정치적 각성을 보여줌
  • 경찰과 미군정에 대한 주민 신뢰의 근본적 균열을 드러냄
  • 경찰의 폭력적 대응 강화로 주민 저항의 급진화 추동
  • 1948년 5·10 단독선거 반대 투쟁으로 발전
  • 결국 4·3사건의 중요한 배경 조건 제공

미군정의 민간인 통제 능력 한계

3·10 총파업은 미군정과 한국 경찰 당국이 제주도의 광범위한 시민 저항을 제어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이는 이후 더욱 강경한 군사적 진압으로의 전환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되었다.

English Section

The March 10 General Strike (3·10 총파업) of 1947 was the largest-scale civilian response to the March 1 Shooting Incident (3·1발포사건) on Jeju Island. With over 95% of the island’s workforce participating, it represented a watershed moment in Jeju’s resistance to military-government rule.

Scale and Participation

The strike encompassed:

  • All private and government-operated factories
  • All transportation industries
  • All schools (teachers and students)
  • 75-90% of military government employees
  • Partial paralysis of finance, communications, and food distribution systems

Notably, both leftist and rightist participants joined the action, transcending ideological divisions in their response to police violence.

Origins and Grievances

Triggered directly by the police response to the March 1 Incident, the strike reflected deeper grievances:

  • Excessive police violence
  • Continued employment of former Japanese colonial police
  • Lack of accountability for those killed

The striking workers, through Representative Kang Soon (강순), presented six demands:

  1. Execution of police who killed civilians
  2. Disarmament of police
  3. Resignation of the police chief
  4. End to police brutality
  5. Removal of all collaborationist police
  6. Compensation for victims’ families

Military Government Response

USAMGIK responded by:

  • Deploying approximately 400 additional police reinforcements
  • The strike continued as a non-violent protest through mid-March
  • By March 17-18, 90% of government employees and 50% of transport workers had returned to work
  • Authorities labeled participants as “extreme leftists” despite the cross-ideological nature of the action

Historical Significance

The March 10 General Strike demonstrated:

  • The depth of civilian opposition to police violence and military-government rule
  • The fragility of USAMGIK authority among the Jeju civilian population
  • That suppression of dissent would require military rather than police action
  • A crucial precursor to later opposition to the May 10 Election (5·10선거) and the eventual Jeju 4·3 Incident (4·3사건)

The strike’s failure to achieve its objectives and the authorities’ resort to force both contributed to the escalation of conflict that followed in subsequent years.

관련 항목

출처

  • 미국자료집 Vol.7 No.479 (1947.3.10)
  • 미국자료집 Vol.7 No.480 (1947.3.10)
  • 미국자료집 Vol.7 No.482 (1947.3.17)
  • 미국자료집 Vol.7 No.79 (1947.3.15)
  • 미국자료집 Vol.7 No.80 (1947.3.15)
  • 미국자료집 Vol.7 No.88 (1947.3.19)
  • 진상조사위원회 최종 보고서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