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 70주년 — 어둠에서 빛으로

개요

이 저작은 제주4·3평화재단에서 발간한 대규모 사료집으로, 4·3사건 70주년을 기념하여 1947년 3월 1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의 제주4·3 관련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1162페이지에 달하는 이 책은 진상규명 운동, 문화기억, 국내외 연대, 화해와 상생에 이르기까지 4·3의 전체 역사를 포괄적으로 다루고 있다.

제주4·3특별법 제2조의 공식 정의: “제주4·3사건이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그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


제1부 제주4·3진상규명 운동과 탄압

1절 4·19혁명과 4·3진상규명 운동 (1960년)

제주의 3·15 부정선거

1960년 3월 15일의 부정선거는 전국적으로 4·19혁명을 촉발시킨 결정적 계기가 되었으며, 제주 지역도 예외가 아니었다. 관권 부정선거는 1959년 10월부터 조직적으로 준비되었다.

주요 사실:

  • 1959년 10월 제주도지사실에서 국·과장, 경찰서장, 시장, 군수, 교육감 연석회의 개최
  • 공무원친목회 조직을 통한 선거운동 지휘
  • 각 공무원이 유권자 25명씩을 포섭하여 자유당 후보자 당선 종용
  • 내무부 지방국장 최병환의 비밀지령서 (3월 3일자): “전 공무원은 단결하여 자유당의 이승만·이기붕 양인을 기필코 당선시키라”

선거 자금 동원:

  • 제주도 총무국장 100만 원
  • 경찰 국장 100만 원
  • 제주·서귀경찰서장 각 250만 원
  • 지서 주임 80만 원
  • 경찰 단위조장 60만 원

부정투표 방식:

  • 선거인명부에 유령인물 기재
  • 비밀경찰 지휘 아래 3인조 공개투표
  • 투표용지 환표·환함 등

제주대학생 중심의 4·19 시위

제주 지역의 4·19 운동은 중앙의 민주화 투쟁과 병행하여 전개되었다. 제주도 행정 당국은 4월 15일자로 3·15 선거 후의 민심 수습책을 각 시·군에 시달했다.

4월 21일 제주경찰서 대책회의:

  • 제주시내 각급 학교 대표, 도 장학진, 정당·사회단체 대표 등 20여 명 참석
  • 조경찰서장이 발포 가능성을 암시

제주지역에서 구속된 주요 인물로 전인홍 제주도지사, 이문교, 박경구 등이 있으며, 이들은 5·16 쿠데타 직후 석방되었다 (1961년 11월).

2절 5·16 쿠데타와 4·3의 탄압

군부통치와 4·3의 금기화

1961년 5월 16일 5·16 쿠데타 이후 군부 독재 정권은 4·3에 대한 극도의 언급 제한과 탄압을 강화했다. 이 시기는 “4·3의 금기 시대”로 특징지어진다.

특징:

  • 4·3 관련 신문 기사, 출판물에 대한 전면 검열
  • “연좌제”를 통한 4·3 희생자 및 유족에 대한 차별과 탄압
  • 입 밖에 꺼내는 것조차 금기시되던 “4·3” 공포 정국
  • 학생운동, 시민운동 진영도 4·3 언급 불가

1970년대 중반까지 4·3은 한국 사회에서 거의 모든 공개적 논의에서 배제되었으며, 이는 국가 권력의 의도적 역사 삭제 정책이었다.


제2부 6월 민주항쟁과 4·3진상규명 운동의 재개 (1986-1999)

1절 대학가의 4·3운동

제주 대학가의 정치 투쟁 태동

제주 지역 대학가에서 4·3진상규명의 필요성이 공개적으로 제기된 것은 1987년 6월 민주항쟁 전후이다. 그러나 대학가의 정치 투쟁 시작은 이보다 먼저였다.

초기 운동 (1980년대 초반):

  • 1980년: 광주 학살 이후 제주 대학가에서 문화서클 태동
  • 1983년: “자유항 반대 투쟁”
  • 1984년 말: 제주대학교 총학생회 부활
  • 1985년 2월: 제주시 광양국민학교 운동장에서 첫 정치투쟁
    • 제주대 4학년 장은심, 김옥임, 오옥만이 광주학살 진상규명과 민정당 정권 심판 내용의 유인물 배포
    • 이 사건이 제주 지역 대학가 학생운동사에 첫 정치투쟁으로 기록됨

4·3 공개화의 계기:

  • 1986년 4월 3일: 대학가 첫 4·3분향소 설치
  • 1987년: 첫 4·3위령제 개최
  • 1987년: “4·3대자보” 사건 — 대학가에서 4·3을 공론화시키는 의미 있는 사건
  • 6월 민주항쟁: 대중적 노선으로의 급속한 전환, 4·3진상규명 투쟁의 대중화

대학가 4·3진상규명 운동의 3개 시기

제1기 (1980년 초반~1988년): 선도적 역할의 시기

  • 대학가에서 선도적으로 4·3 관련 자료 비밀 복사·학습
  • 4·3을 제주 지역 운동의 “역사적 지주”로 인식

제2기 (1989~1992년): 본격 투쟁의 시기

  • 1989년 4월 3일: 제주대학교 학생들의 4·3 41주기 추모대회
  • 1989년 사월제공준위(사월제공준위), 제주시민회관에서 첫 4·3추모제 개최
  • 1990년 4월 1일: 제주교육대학에서 정공철 심방이 추모굿 진행
  • 1991년 4월 3일: 제주4·3사건민간인희생자유족회, 제1회 합동위령제 개최 (신산공원)
    • 합동위령제는 1993년까지 계속됨

제3기 (1993~1999년): 대중화와 특별법 제정의 시기

  • 1994년: 도의회 4·3특별위원회 (위원장 김영훈) 중재로 첫 합동위령제 합의 체결
    • 유족회장 김병언과 사월제공준위 공동대표 고창훈 (1994년 3월 15일)
  • 1994년: 도의회가 “4·3 기초조사의 해” 선포
  • 1994년 2월 7일: 도의회 4·3피해신고 접수처 현판식
  • 1997년 49주기부터: 제주종합경기장에서 위령제 개최
  • 1999년까지: 도민적 규모의 위령제 계속

제주도의회의 역할

도의회 4·3특별위원회의 성과:

  1. 전면적 희생자 조사

    • 4·3피해신고실 개설
    • 읍면·동에 희생자 접수창구 마련
    • 17명의 조사요원 위촉
    • 1만 2천여 명의 희생자 명단 확보 — 그동안의 추측과 과장, 축소의 논란을 잠재울 수 있었음
    • 이후 4·3특별법에 의한 희생자 신고 시 중요한 기초 자료 제공
  2. 분산적 위령행사의 통합

    • 1987년 6월 항쟁 이후 봇물처럼 터져 나온 도민적 요구
    • 1989년 이후 유족회 중심 위령제와 사회단체 중심 추모제 분리 개최로 도민 사회 분열
    • 도의회의 중재로 1994년부터 합동위령제 개최
    • 위령사업 범도민추진위원회 조례 제정
  3. 정부와 국회 추동

    • 청원과 건의, 방문 수차례 진행
    • 피해조사 보고서 발간을 통해 과거사 문제해결의 국민적 관심사 형성
    • 5·18민주화 운동, 거창사건 등과 함께 과거사 해결의 시대적 흐름 형성
  4. 지방자치 역량 증대

    • 30년 만에 출범한 지방의회
    • 비로부터의 상승 작용으로 지역 문제 자체 해결
    • 의회, 언론, 관련 단체, 도민 합심의 사례 제시

2절 4·3예술 활동과 교육

4·3 당시의 예술 창작

4·3사건 진행 중에도 창작된 문학과 예술 작품들이 있으며, 이들은 4·3의 역사적 의미를 담아내고 있다.

시와 문학 (1948-1950년대):

  • 이수형의 시 「산(山)사람들」 (1948년 7월, 『문학』제8호 수록)
    • 입산 투쟁하는 제주민중들의 결연한 모습 형상화
  • 강승한의 서사시 「한나산」 (1948년 9월, 북한 발표)
    • 부제: “제주도 인민 유격대 용사들에게 올리노라”
    • 미제국주의의 횡포에 맞선 무장투쟁의 양상, 통일 운동의 관점 드러냄
  • 조규창의 시 「제주도 빨찌산들에게 영광을 드린다」 (1950년 4월)
    • 부제: “4·3봉기 2주년에”
    • 빨치산 투쟁을 찬양하며 그 의의 강조
  • 허윤석의 단편 「해녀」 (1950년 2월, 『문예』 수록)
    • 토벌군으로 제주에 들어온 부대의 사건 다룸

희곡:

  • 함세덕의 희곡 「산사람들」 (1949년 12월-1950년 3월, 북한 『문학예술』 분재)
    • 제주 민중의 입산 무장투쟁 과정 구체적으로 그려냄
    • 반미통일 투쟁으로서의 4·3의 의미 부각
    • 해주(1948년), 평양(1949년, 1950년)에서 무대 공연
  • 반공 연극: 「밝아오는 한라산」(일명 ‘김봉길 참회기’, 1952년 6월, 제주극장)

영화:

  • 「제주도 메이데이」 2편 (1948년 미군정 촬영)
  • 「한라산에 봄 오다」 (1953년, 제주도 경찰국 제작, 50분 분량)
    • 감독: 오권, 감수: 이경진
    • 내용: “4·3사건이 남긴 잔비 떼가 읍내까지 침입하여 소요를 시작한 작년 가을 이후 토벌 투쟁의 기록”
  • 「산(The Mountain)」 (1961년, 미국 공보원 제작)
    • 원제: 「한라산」으로 명칭 변경
    • 45분 분량, 세계 48개국에 홍보물로 유포
    • 교래리 세트장, 경남 상남시 미공보원 촬영소 등에서 6개월 촬영
    • 출연: 홍성중 교사 (조천국민학교 근무, 이덕구 역)
  • 반공 영화 「한라산」 (1967년 제작)

음악:

  • 「인민항쟁가」 (임화 시, 김순남 곡, 1946년)
  • 「부용산」 (박기동 작사, 안성현 작곡, 1948년)
  • 「추모가」 (“날아가는 가마귀야”로 알려짐)
  • 하산 권종 노래:
    • 「돌아와요 돌아와」 (이기형 작사, 김종철 작곡, 1948년)
    • 「그리운 그 옛날」 (이기형 작사·작곡, 1948년)

4·3 예술의 수난과 성과 (1950s-1980s)

4·3이 금기시된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제주에서는 4·3 관련 공개적 예술 활동이 거의 불가능했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 민주화 운동과 함께 4·3 예술 활동이 본격화되었다.

1980년대 후반 이후:

  • 사진, 미술, 연극, 다큐멘터리, 시와 문학 등 다양한 장르에서 4·3 다루기 시작
  • 예술을 통한 4·3 기억의 사회화

4·3교육의 자리매김

제주4·3은 학교 교육, 특히 제주 지역 사회 교육의 핵심 주제로 자리 잡았다.

학교 교육:

  • 초등학교부터 대학 교과과정에 4·3 역사 반영
  • 제주 지역 청소년들의 정체성 형성에 기여

사회 교육:

  • 유족회, 시민단체, 제주4·3평화재단 등의 교육 프로그램
  • 기념관, 교육센터, 박물관 등에서의 상설 교육

제3부 4·3언론 보도와 진상 규명

3절 4·3사건과 언론 보도

미군정과 제주4·3 (1945-1948)

미군정 시기의 언론은 4·3사건을 극도로 제한적으로 보도했으며, 이후 반공 이데올로기에 따른 보도 편향이 심했다.

4·19혁명과 4·3진상규명 운동 (1960)

1960년 4·19 이후 제주 지역 언론은 4·3진상규명 관련 기사를 본격적으로 보도했다.

주요 신문:

  • 제주신보: 부정선거 사실, 4·3진상규명 운동 관련 기사 다수 보도
  • 한국일보: 5·16 직후 구속자 석방 기사 (1961년 11월 11일)

언론민주화 운동과 4·3의 대장정 (1987-1999)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언론의 4·3 보도가 획기적으로 변화했다.

변화의 특징:

  • 제민일보를 비롯한 제주 지역 언론의 4·3 관련 기사 급증
  • 4·3 관련 기자회견, 집회, 위령제 등의 적극적 보도
  • 1989년 이후 지속적인 4·3 진상규명 운동 보도
  • 1993년 이후 4·3특별법 제정 논의 보도

제민일보의 역할:

  • 1993년 10월 27일: 4·3 관련 특집 보도
  • 1991년 7월 31일: 4·3 유족회 조직 관련 보도
  • 1998년 3월 2일: 4·3범국민위 활동 보도

언론과 4·3의 자리매김

1987년 이후의 언론 보도는 4·3을 한국 현대사의 주요 사건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언론의 적극적 보도는 사회적 관심 고조, 정부의 정책 변화, 법적 제도 마련 등으로 이어졌다.


제4부 4·3희생자유족회의 발족과 통합

5절 4·3희생자유족회의 발족과 통합 (1989-2001)

초기 유족회 조직 (1989-1994)

1991년 4월 3일:

  • 제주4·3사건민간인희생자유족회 제1회 합동위령제 개최 (신산공원)
  • 1993년까지 계속됨

1994년 3월 15일:

  • 도의회 4·3특별위원회 (위원장 김영훈) 중재로 유족회와 사월제공준위 간 첫 합동위령제 합의
  • 유족회장: 김병언
  • 사월제공준위 공동대표: 고창훈

1994년 4월 3일:

  • 제46주기 합동위령제 개최
  • 이후 합동위령제는 1996년 48주기까지 탑동광장에서 개최

유족회 통합 (2001년)

주요 배경:

  • 1989년부터 1994년까지 유족회 중심과 사월제공준위 중심으로 이원화된 위령 활동
  • 도민 사회의 분열 우려
  • 효율적 투쟁을 위한 통합 필요성 인식

통합의 과정:

  1. 1999년 3월 8일: 4·3도민연대 결성대회

    • 다양한 시민단체, 유족 조직의 광범위한 참여
  2. 2001년 2월 28일: 유족회 통합선언 기자회견

  3. 2001년 3월 3일: 4·3유족회 통합 창립대회

    • 새로운 조직체 출범
  4. 2001년 3월 20일: 통합유족회사무실 개소식 및 현판식

  5. 2007년 3월 5일: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

    • “제주4·3희생자유족회”

4·3행방불명희생자유족회의 발족 (2000년)

배경:

  • 1999년 “수형인명부” 발굴
    • 기존에 알려지지 않은 행방불명인 존재 확인
  • 부모형제가 언제, 어디서, 왜 죽었는지 모르면서 살아온 유족들의 눈물

2000년 3월 13일: 제주4·3행방불명인유족회 창립

주요 활동:

  • 2000년 4월 5일: 제1회 진혼제 봉행 (주정공장 옛터)
  • 2006년 4월 2일: 제7회 4·3사건 행방불명인 진혼제
  • 2008년까지: 주정공장 옛터에서 진혼제 봉행
  • 2011년부터: 평화공원 행방불명인 표석 위령제단 앞에서 진혼제 봉행
  • 2008년 3월 30일: 행방불명희생자 혼백 귀향제 개최

유족회의 사료 기록

『제주4·3희생자유족회 27년사』 (2015년 발행)

  • 1989년 초기 발족부터 2015년까지 27년간의 활동 기록
  • 유족들의 증언과 투쟁의 기록

제5부 4·3진상조사보고서와 특별법

제1절 4·3특별법 제정의 경과 (1993-2000)

도의회의 기초조사 (1993-1994)

1993년 3월 20일:

  • 제주도의회 4·3특별위원회 (위원장 김영훈) 출범
  • 국가 공식기관으로서 과거사 문제 최초 제기

1994년의 조사 본격화:

  • 2월 7일: 도의회 4·3피해신고 접수처 현판식
  • “4·3 기초조사의 해” 선포
  • 1만 2천여 명의 희생자 명단 확보

중앙 차원의 추동 (1995-2000)

1997년 4월 1일:

  • 4·3범국민위원회 결성
    • 국회, 시민단체, 언론, 학계의 광범위한 참여
    • 대규모 국민 서명 운동 전개

2000년:

  • 4·3위원회 현판식 (서울 통의동, 8월 28일)
  • 4·3실무위원회 현판식 (제주도청, 9월 7일)

특별법 이전의 조직 활동

1987년 9월 6일:

  • 서울에서 제주사회문제협의회 결성
  • 회보와 소식지를 통한 정보 제공

법적 틀의 형성

특별법 제정 과정은 1993년부터 2000년까지 7년간에 걸친 지속적인 투쟁의 결과였으며, 이 과정에서 도민의 광범위한 참여와 국민적 지지가 필수적이었다.


제6부 4·3진상조사보고서 의의

1절 진상조사보고서 의미와 4·3위원회

4·3위원회의 구성과 활동

2000년 8월 28일: 4·3위원회 현판식 (서울 통의동) 2000년 9월 7일: 4·3실무위원회 현판식 (제주도청)

진상조사의 목표

  1. 4·3사건의 발생 원인과 경과 규명
  2. 피해자 및 희생자 확인과 명부 작성
  3. 불법 행위와 책임 규명
  4. 역사적 진실 기록

2절 4·3진상조사 활동

진상조사 위원회는 다양한 방법으로 증거와 증언을 수집하고 검증했다.

조사 방법:

  • 유족과 피해자 증언 청취
  • 문서 및 사료 수집
  • 발굴 유해의 과학적 분석
  • 국내외 사료 조사

3절 진상조사보고서 의결과 보고서 결론

2003년 10월 15일:

  • 제8차 4·3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진상조사보고서 최종 의결
  • 70년 만의 공식 진상 규명

제7부 대통령 사과 (2003)

1절 대통령 사과의 의의

대통령의 공식 사과는 4·3에 대한 국가 권력의 불법을 인정하는 획기적 조치였다. 사과는 단순한 형식적 조치가 아니라 국가의 법적, 도덕적 책임 인정이었다.

2절 대통령 사과의 반응

도민의 반응:

  • 70년간의 억압과 금기의 해제
  • 진상규명 투쟁의 대승리로 평가
  • 동시에 책임자 처벌, 배상 등 과제의 지속성 인식

제8부 4·3희생자 확정과 유해 발굴

1절 4·3희생자 확정 (2002-2003)

2002년 3월 18일:

  • 4·3희생자결정기준에 따른 유족회 기자회견
  • 희생자 판정 기준에 대한 논쟁

2009년 3월:

  • 극우보수 단체의 “희생자결정 무효확인소송” 제기
  • 서울행정법원의 항소심 원고기각 판결

2절 4·3유해의 발굴 (1992-2011)

초기 유해 발굴 (1990년대)

1992년:

  • “다랑쉬굴”에서 11구의 유해 발견
    • 현장 철조망, 시멘트로 차단된 사건
    • 당국의 은폐 시도 명확

주요 유해 발굴 지역

1. 제주국제공항:

  • 별도봉 진지동굴 유해 발굴
  • 화북천 지역 유해 발굴
  • 발굴된 유류품: 총탄, 단추, 동전 등
  • 총 384구의 유해와 1천 970점의 유류품 수습 (두 차례 발굴)
  • 집단학살로 “폭낭 뿌리”가 된 공항 학살터

2. 대전 골령골

3. 마포형무소 옛터

4. 경북 가창댐

5. 전주형무소 옛터

6. 목포 석산

유해 발굴의 의미

  • 행불인의 신원 확인
  • 학살 방식과 규모의 과학적 증거 제시
  • 국가 폭력의 구체적 입증

3절 4·3유적의 복원

신산공원의 4·3해원방사탑:

  • 1998년 4월 18일 제막
  • 4·3 50주년 기념 사업의 일환

잃어버린 마을 표석:

  • 2001년 3월 29일 제막 (“물터진골”)

1964년 주정공장 옛터:

  • 토벌대에 검거되거나 산으로 피신했다가 하산한 주민들의 임시수용소
  • 현재 현대아파트 부지

제9부 제주4·3평화공원과 추모시설

1절 제주4·3평화공원 조성 (2003-2011)

공원 조성의 배경

대통령 사과 이후 국가 차원의 추모 공간 필요성이 인식되었으며, 이는 제주4·3평화공원 조성으로 결실을 맺었다.

주요 시설 및 일정

2003년 4월 3일:

  • 제주4·3평화공원 기공식 개최

2008년 3월 28일:

  • 제주4·3평화기념관 개관식

2008년 4월 2일:

  • 제주4·3 60주년 기념 방사탑 제막식

2009년 10월 27일:

  • 4·3행방불명희생자 표석 준공식

2009년 4월 3일:

  • 제주4·3희생자 각명비 제막식

2011년 3월 26일:

  • 제주4·3행방불명인 발굴유해 영령 봉안식

평화공원의 구성

주요 시설:

  1. 위패봉안실 (①번)
  2. 4·3행방불명희생자 표석 (②번)
  3. 봉안관 (③번)
  4. 위령광장 (④번)
  5. 귀천 (⑤번)
  6. 위령탑 (⑥번)
  7. 각명비 (⑦번)
  8. 제주4·3평화기념관 (⑧번)
  9. 문주 (⑨번)
  10. 비설(모녀상) (⑩번)
  11. 제주4·3평화교육센터 (⑪번)

베를린 장벽 기증

독일 베를린시에서 기증한 베를린 장벽이 평화공원에 설치되어, 국제적 화해와 평화의 상징으로 기능함.

2절 제주4·3평화재단 (2000년 설립)

조직의 설립과 역할

설립 시기: 2000년

주요 역할:

  1. 4·3 진상규명과 기록 사업
  2. 국내외 4·3 정보 수집 및 보급
  3. 유족 지원 및 추모 사업
  4. 평화 교육
  5. 국제 연대 활동

주요 사업

자료 발간:

  • 『제주4·3희생자유족회 27년사』 (2015)
  • 다수의 4·3 연구 자료집
  • 교육 자료 개발

교육 활동:

  • 평화교육센터 운영
  • 학교 및 사회 교육 프로그램 제공
  • 기념관을 통한 상설 전시 및 특별 전시

국제 연대:

  • 2012년 11월 27일: 재일민단중앙본부와 4·3희생자 추가신고 홍보 협의
  • 2012년 11월 28일: 오사카총영사 면담 (4·3희생자 추가신고 홍보 협의)

제10부 4·3과 국제 연대

재일제주인의 4·3운동

오사카 중심의 운동 (1988년부터)

1988년 4월 3일:

  • 도쿄에서 “제주도 4·3사건을 생각하는 모임” 발족
  • 오사카에서도 조직 결성

1998년 3월 21일:

  • 오사카 4·3위령제 개최
  • 팸플릿을 통한 정보 제공

문화 연대를 통한 기억 공유

놀이패 ‘한라산’:

  • 2003년 4월 10일 도쿄 공연
  • 제주의 문화를 통한 4·3 기억의 국제적 전파

재일민단과의 협력 (2012년)

2012년 11월 27일:

  • 재일민단중앙본부, 4·3희생자 추가신고 홍보 협의

2012년 11월 28일:

  • 오사카총영사와 협의
  • 재일제주인 커뮤니티의 광범위한 참여

국제적 화해와 연대

제주4·3은 점진적으로 국제 사회에서도 인식되기 시작했으며, 이는 동아시아 지역의 역사 정의와 화해의 모델로 평가받고 있다.


제11부 화해와 상생

1절 4·3의 수난 시대 (1948-1986)

38년간의 금기와 탄압

1948년 4월 3일부터 1986년까지 38년간은 4·3 역사가 가장 억압되고 왜곡되던 시기였다.

특징:

  • 국가 차원의 역사 삭제 정책
  • 연좌제를 통한 유족 차별
  • 교육에서의 4·3 배제
  • 언론의 보도 금지

이 시기 제주민들은 “숨죽여” 산다는 표현으로 그들의 고통을 표현했다.

2절 헌법재판소의 판결

헌법재판소는 여러 차례 4·3과 관련된 법적 판결을 통해 국가의 불법을 인정했다.

주요 판결:

  • 4·3희생자 결정의 법적 정당성 인정
  • 희생자 배상 청구권의 성립 인정

3절 일반소송과 판결

희생자 재심사 문제

2002년 3월 18일:

  • 4·3희생자결정기준에 따른 재심사 진행

2009년:

  • 극우보수 단체의 “희생자결정 무효확인소송” 제기
  • 서울행정법원의 항소심 원고기각 판결

소송을 통한 명예회복

다양한 민사 소송을 통해 개별 희생자들의 명예가 법적으로 회복되고 있다.


제12부 추념과 기억 실천

1절 합동위령제 (1991-2003)

초기 위령제

1991년 4월 3일:

  • 제주4·3사건민간인희생자유족회 제1회 합동위령제 (신산공원)

통일 위령제의 확대

1994년:

  • 도의회 중재로 유족회와 사월제공준위의 첫 합동위령제 합의

1996년까지:

  • 탑동광장에서 위령제 개최

1997년 49주기부터:

  • 제주종합경기장에서 대규모 위령제 개최

2000년 4월:

  • 평화공원 가설제단에서 위령제 시작

2003년 55주기까지:

  • 평화공원 가설제단에서 위령제 봉행

2절 추념일 지정과 추념식 봉행 (2014년)

국가추념일 지정

2014년:

  • 4월 3일을 “4·3희생자추념일”로 국가기념일 지정
  • 70년 만의 공식적 국가 추념

공식 추념식

2014년 4월 3일:

  • 국가추념일로 지정된 첫 추념식 봉행
  • 국가 공식 행사로 격상

3절 화해와 상생

해원과 추모의 의미

4·3 70년의 역사는 억압에서의 해방, 침묵에서의 발언, 죽음에서의 기억으로의 여정이었다.

4·3의 완전한 해결을 위한 과제:

  1. 진상규명: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보고서 확정 후에도

    • 행불인, 수형인에 대한 추가 조사 필요
    • 사건의 세부적 경위에 대한 지속적 규명
  2. 명예회복: 희생자 결정과 위패 봉안 후에도

    • 희생자 재심사 문제에 대한 지속적 노력
    • 4·3추념일의 정부 주도적 추념 강화 필요
  3. 책임자 처벌: 대통령 사과 이후에도

    • 4·3 당시 학살 주체에 대한 법적 책임 규명 미흡
    • 사회적 정의 구현을 위한 방안 모색 필요
  4. 보상 및 배상: 유족 지원 확대

    • 생계비 지원
    • 의료 지원
    • 교육 지원 확충
  5. 정신 계승: 4·3 정신의 세대 간 전승

    • 교육과 문화를 통한 기억 유지
    • 평화와 화해의 가치 실현

특별 기록

제주4·3특별법의 정의

제주4·3특별법 제2조에 명시된 4·3사건의 정의:

“제주4·3사건이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그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

주요 통계

  • 희생자 명단: 1만 2천여 명 (도의회 조사 결과)
  • 발굴 유해: 제주국제공항에서만 384구 + 1,970점의 유류품
  • 위령제 개최: 1991년부터 지속 (매년 4월 3일)
  • 국가기념일 지정: 2014년
  • 평화공원 개관: 2003년 기공, 2008년 본격 개관

주요 인물

도민 지도자:

  • 이문교: 1960년 4·19 이후 4·3진상규명 운동 주도
  • 박경구: 초기 4·3진상규명 주역
  • 고순화, 고시홍, 채만화, 양기혁: 1960년 4·3사건 진상규명동지회 회원

조사 위원회:

  • 김영훈: 도의회 4·3특별위원회 위원장

유족회 지도자:

  • 김병언: 제주4·3사건민간인희생자유족회장
  • 고창훈: 사월제공준위 공동대표

학생 운동가:

  • 장은심, 김옥임, 오옥만: 1985년 2월 광양국민학교 운동장 반정부 시위
  • 정공철 심방: 1990년 4월 추모굿 봉행

결론

제주4·3 70주년을 기념하는 이 사료집은 단순한 역사 기록을 넘어, 70년간의 투쟁과 치유의 과정을 담은 제주 도민의 “기록문화”이다. 이 책이 제시하는 것은:

  1. 장기 시민운동의 모델: 1987년부터 2000년까지 14년간의 지속적이고 광범위한 진상규명 투쟁
  2. 문화기억의 중요성: 문학, 미술, 음악, 영화 등을 통한 4·3 기억의 보존과 전파
  3. 국제 연대의 가능성: 재일제주인을 포함한 해외 동포와의 연대
  4. 제도적 성과: 특별법, 위원회, 추념일, 평화공원 등 국가 차원의 공식화
  5. 미완의 과제: 책임자 처벌, 완전한 보상, 세대 간 정신 계승

이 책은 Memory Studies와 사회운동 연구의 중요한 자료로, 역사 정의와 화해 과정에 대한 학문적 토대를 제공한다.


관련 자료

  • 『제주4·3희생자유족회 27년사』(2015)
  • 제주4·3특별법 (2000)
  • 진상조사보고서 (2003)
  • 제주4·3평화재단 간행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