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벌대 / Suppression Forces

한국어

기본 정보

항목내용
정식 명칭국방경비대 제9·11연대 + 경찰 + 우익 민간 동원 부대
구성군 정규부대 (약 70%) + 경찰 (약 20%) + 청년단·민보단 (약 10%)
작전 기간1948년 10월–1949년 9월 (11개월)
작전 지역제주도 전역 (산간 부대 → 해안 마을 소개)
최고 사령관미군 대령 (제주지구 최고사령관)
제주 지상 지휘송요찬 소령 (9연대 부연대장, 후 제9연대장)
민간 동원민보단 (1949년 4월 5만 명 규모)

개요

토벌대는 국방경비대 제9·11연대를 중심으로 제주경찰, 우익청년단, 민간인으로 구성된 이질적인 집단이다. 미군 대령이 제주지구 최고사령관으로 직접 감독했으며, 송요찬 등 한국 장교들이 현장 지휘를 담당했다. 1948년 10월 이후 벌어진 초토화작전에서 제주도 민간인의 80% 이상을 살해한 주체다. 토벌대는 단순한 군사 조직이 아니라, 국가폭력의 가장 극단적 형태인 대량살상을 실행한 기관이다.1


구성과 계층화

국방경비대 제9연대와 제11연대

  • 제9연대: 본부가 모슬포에 주둔. 연대장 김익렬 중령(1948년 초–4월), 이후 부연대장 송요찬 소령이 실질적 지휘권 행사
  • 제11연대: 본부가 제주읍에 주둔. 연대장 최경록 중령
  • 각 연대는 2개–3개 대대로 구성되었으며, 대대 이하는 소대 단위로 산간과 해안 지역에 분산 주둔

각 연대는 미군 고문관(Captain급)을 배치받았다. 예를 들어, 제9연대의 고문관 리치 대위와 웨스트 대위는 1948년 6월–7월 군사 조직과 토벌 계획을 감독했다.2

경찰 병력

제주경찰(경찰서·지서)은 도시 지역의 순찰과 용의자 체포·신문을 담당했다. 경무부장 조병옥 하의 경찰은 산간 토벌 작전에 동반되어 “용공협력자” 식별을 담당했다. 경찰은 토벌대의 약 20%를 구성했다.3

우익 민간 동원

  • 청년단: 서북청년회 등 보수 우익 청년 조직 (1948년 4월–10월)
  • 민보단: 1949년 4월부터 본격 조직. 미군 보고에 따르면 제주도 민보단은 1949년 4월 1일 5만 명에 달했다. 이는 제주 전체 성인 남성 인구의 상당 부분이다. 민보단원들은 경찰과 군의 지시에 따라 산간 초토화 작전에 동원되고, 마을 소개 및 피난민 검문에 참여했다.4

이들 민간 조직은 국방경비대의 공식적 명령 계통 밖에 있었으나, 실질적으로 토벌 작전의 일부였다. 이를 통해 국가는 대량학살의 책임을 일부 분산할 수 있었다.


초토화 작전의 실행

산간 부대 중심 작전(1948년 10월–1949년 2월)

처음 단계는 입산한 무장대를 색출하고 산간 지역을 “소거(clearing)“하는 작전이었다. 토벌대는 매 지역을 통과할 때마다 마을을 “수색”한다는 명목으로 민간인을 대량 살해했다.5

해안 마을 소개(1949년 3월–1949년 9월)

두 번째 단계는 해안 지역 주민을 강제로 이동시키는 “소개” 작전이었다. 이 과정에서:

  • 해안 마을의 모든 주민이 산간 수용소로 강제 이동
  • 이동 거부자 및 무장대 용의자로 지목된 자 즉시 살해
  • 산간 수용소에서의 기아·질병으로 인한 추가 사망

미군 고문관 리치 대위와 웨스트 대위는 이 작전을 관찰하고 보고했다.6

보복학살과 복합 학살

1948년 11월 18일 조천면 함덕리의 사례는 토벌대의 학살 양태를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행원목장 안 토굴에서 도피 생활을 하던 대청단원 10여 명이 1948년 11월 5일 김녕지서로 자수하였으나, 함덕군부대(국방경비대 제9연대 제2대대)로 이송되었다. 이후 11월 18일 함덕리 평사동 모래밭에서 집단 총살당했다.7

이 사건은 자수 → 경찰 인계 → 군 처형으로 이어지는 체계적 학살 메커니즘을 보여준다.


학술적 의의

국가폭력의 행위자

토벌대는 추상적인 “국가 권력”의 대면적 행위자(face of state violence)였다. 개별 군인, 경찰관, 우익 청년들은 상급 명령을 따르면서 동시에 조직적 학살에 참여했다. 진상조사보고서는 이를 “집단적 책임”으로 규정한다.8

민간-군사 경계의 무너짐

민보단의 동원을 통해, 토벌대는 국방경비대만의 조직이 아니라 제주 사회 전체의 동원 체계가 되었다. 이는 국가폭력이 얼마나 광범위한 사회 구성원을 엮어낼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9

미국의 감독과 책임

미군 대령의 최고사령관 역할과 각 연대별 미군 고문관의 참여는, 토벌대의 대량학살이 순전히 한국 당국의 독단이 아니라 주한미군의 감독 하에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이는 KMAG의 책임 문제로 이어진다.10


English

Overview

The Suppression Forces (토벌대) were composed of the Korean Constabulary’s 9th and 11th Regiments (approximately 70%), Jeju Police (approximately 20%), and mobilized right-wing youth groups and civil militia (approximately 10%). The forces operated from October 1948 through September 1949 under the command of a U.S. Army colonel serving as senior military commander in the Jeju operational zone. Under the direction of commanders like 송요찬 and supervised by American military advisors, the Suppression Forces were responsible for the deaths of approximately 30,000 civilians — roughly 80% of the total Jeju 4·3 victim count.11

Structure and Composition

Military Core: The 9th Regiment (headquarters in Mosulpo) and 11th Regiment (headquarters in Jeju city), each with 2–3 battalions dispersed across mountainous and coastal zones. Each regiment had a U.S. Army captain as military advisor.

Police Component: Jeju Police, under Police Chief 조병옥, participated in arrest operations, interrogation, and “identification” of communist collaborators.

Civilian Mobilization:

  • Youth Groups (April–October 1948): Right-wing organizations like the Northwest Youth League
  • Civil Militia (민보단, from April 1949): By April 1949, the Jeju civil militia numbered approximately 50,000 — roughly the entire adult male population. These civilians were mobilized for mountain operations, village “clearances,” and displaced-person checking.12

Scorched-Earth Campaign Phases

Phase 1 (October 1948–February 1949): Mountain region clearing. Villages were “searched” and residents summarily executed on suspicion of harboring insurgents.

Phase 2 (March–September 1949): Forced removal of coastal populations to inland collection points. The “removal” process itself became a mass killing operation: those who resisted, those identified as communist collaborators, and those unable to walk were executed on the spot.13

Massacre Pattern: A November 18, 1948 case from Hamdeok, Chocheun illustrates the systematic killing mechanism: armed persons surrendered to police → transferred to military custody → executed in group massacres. Witnesses were killed to prevent testimony.14

Key Figures

NameRank/PositionRole
송요찬Deputy Commander–Commander, 9th RegimentField command of most killings
조병옥Police ChiefPolice-military liaison and suspect identification
U.S. ColonelSenior Military Commander, Jeju zoneOverall command and supervision
KMAG advisorsCaptain level, by regimentObservation and reporting

See Also


Footnotes

  1. 진상조사보고서(2003), 제Ⅲ장 “초토화작전과 집단학살”; 제주4.3평화재단(2020), 추가진상조사보고서 Ⅲ장 “집단학살 사건” (pp.135-300).

  2. 제주4.3평화재단(2020), 추가진상조사보고서 화보, p.14 (1948년 초반 제9연대 간부들 사진), p.15 (1948년 7월 제11연대 간부들 사진, 미군 고문관 리치 대위·웨스트 대위).

  3. 제주4.3평화재단(2020), 추가진상조사보고서 Ⅰ권, pp.441–496 (경찰의 예비검속 역할); 진상조사보고서(2003), Ⅲ장.

  4. 제주4.3평화재단(2020), 추가진상조사보고서 화보, p.15 (1949년 민보단 훈련 사진, 미군 보고 인용: “1949년 4월 1일 제주도 민보단원은 5만명에 달했다”).

  5. 제주4.3평화재단(2020), 추가진상조사보고서 Ⅲ장 (pp.135–250 산간 부대 중심 집단학살 기록).

  6. 제주4.3평화재단(2020), 추가진상조사보고서 Ⅲ장 (pp.250–300 해안 마을 소개 및 학살).

  7. 제주4.3평화재단(2020), 추가진상조사보고서 Ⅰ권, p.156 (조천면 함덕리 평사동 11월 18일 학살 사건).

  8. 진상조사보고서(2003), Ⅲ장 “집단적 책임”.

  9. 제주4.3평화재단(2020), 추가진상조사보고서 화보, p.15 (민보단 동원과 국가폭력의 사회화).

  10. 진상조사보고서(2003), Ⅲ장; 추가진상조사보고서(2019), Ⅴ장 “미군 감독 기록”.

  11. 진상조사보고서(2003), 제Ⅰ장 “피해 규모 (약 30,000명)”; 제주4.3평화재단(2020), 추가진상조사보고서 통계 (토벌대 피해 80% 이상).

  12. 제주4.3평화재단(2020), 추가진상조사보고서 화보, p.15 (미군 보고서 인용).

  13. 제주4.3평화재단(2020), 추가진상조사보고서 Ⅲ장 (pp.250–300).

  14. 제주4.3평화재단(2020), 추가진상조사보고서 Ⅰ권, p.1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