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8 평화협상 / April 28 Peace Negotiation
한국어
1948년 4월 28일, 국방경비대 제9연대장 김익렬 중령과 무장대 사령관 김달삼이 제주 한라산 기슭에서 만나 평화적 해결을 모색한 협상이다. 4·3 전개 과정에서 유일하게 시도된 평화적 해결 노력이었으나 결렬됨으로써, 이후 대규모 군사 진압으로의 전환점이 되었다.
배경
4월 3일 무장봉기 이후 약 3주간, 김익렬 연대장은 군사적 진압보다 대화를 통한 해결을 추구하였다. 김익렬은 제주 출신이 아니었으나, 봉기의 배경에 경찰과 서북청년단의 과도한 탄압이 있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었다.
협상 내용
- 장소: 한라산 기슭 (구체적 위치는 기록마다 다소 차이)
- 참석자: 김익렬 중령 (9연대장) / 김달삼 (무장대 총사령)
- 합의 사항: 72시간 이내 전투 중지, 무장해제 절차 개시
- 조건: 경찰과 서북청년단의 탄압 중단, 무장대의 단계적 하산
결렬 — 오라리 방화사건
협상 직후인 5월 1일, 제주읍 오라리에서 우익 청년단체에 의한 것으로 추정되는 방화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은 협상을 의도적으로 파탄시키기 위한 도발로 널리 인식되고 있다.
오라리 사건 이후:
- 미군정은 김익렬 연대장을 경질하고, 강경파 브라운(Brown) 대령이 진압작전을 지휘
- 5월 20일 박진경 대령이 제11연대 연대장으로 부임, 강경 진압 전환
- 무장대와의 대화 채널은 영구히 단절
역사적 평가
진상조사보고서(2003)는 오라리 방화사건을 우익 세력에 의한 의도적 협상 파괴 공작으로 판단하였다.
학술적 재검토 — 김용철(2009)
김용철의 석사논문(제주대, 2009)은 기존 통설에 중요한 재해석을 제기하였다. 핵심 쟁점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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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비판: 기존 연구가 김익렬의 「유고록」(1969년 퇴역 후 작성)에 전적으로 의존해온 것에 비해, 김용철은 김익렬이 1948년 8월 국제신문에 기고한 「기고문」(사건 직후의 1차 자료)을 분석 대상에 포함하였다. 두 기록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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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30일 2차 협상: 「기고문」에 따르면 4월 28일 외에 4월 30일에도 추가 협상이 있었다. 이는 협상 결렬이 5월 1일 오라리 방화와 직접 연결되지 않을 수 있음을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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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라리 사건의 재평가: 오라리 방화에 “지나치게 많은 의미가 부여”되어 왔으며, 당시 제주 각지에서 유사한 사건들이 발생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이 사건이 특별히 협상을 겨냥한 것이었는지 재검토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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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적 한계: 단선·단정 반대를 내걸고 봉기한 무장대와, 5·10선거의 성공적 실시를 통해 남한 점령의 정당성을 확보하려 한 미군정 사이에서 평화적 타협은 애초부터 불가능했다는 것이 논문의 핵심 주장이다. 김익렬 개인의 노력이 아니라 작전회의와 상부(미군정·경비대 최고 지휘부)의 의도가 있었으며, 협상은 진정한 평화 해결이 아닌 전술적 차원에서 추진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이 재해석은 ‘4·28 협상 성사 → 오라리 사건으로 결렬 → 강경진압 전환’이라는 기존의 선형적 서사에 의문을 제기하며, 협상의 실체와 한계에 대한 더 복잡한 이해를 요구한다.
English
On April 28, 1948, Lt. Col. Kim Ik-ryeol, commander of the 9th Regiment, met guerrilla commander Kim Dal-sam on the slopes of Mt. Halla to negotiate a peaceful resolution to the uprising. This was the only peace negotiation attempted during the entire 4·3 period.
Accord and Collapse
The two sides agreed to a 72-hour ceasefire and phased disarmament, conditioned on the cessation of police and NWL repression. However, on May 1, an arson attack in Orari (오라리), widely attributed to right-wing youth groups, destroyed the fragile accord.
The 2003 Truth Commission Report concluded that the Orari incident was a deliberate provocation to derail the peace process. Following its collapse:
- USAMGIK replaced Kim Ik-ryeol with hardliner Colonel Brown
- Col. Park Jin-gyeong took command of the 11th Regiment with orders for aggressive suppression
- All channels for dialogue were permanently severed
Scholarly Reappraisal — Kim Yong-cheol (2009)
Kim Yong-cheol’s MA thesis (Jeju National University, 2009) challenged the conventional narrative by analyzing Kim Ik-ryeol’s contemporaneous 「기고문」 (a contribution published in the International Times in August 1948), contrasting it with the posthumous 「유고록」 (memoirs, written 1969) on which prior scholarship had relied exclusively. Key findings include: (1) a second negotiation session on April 30, suggesting the breakdown was not directly caused by the Orari arson; (2) the Orari incident may have been overemphasized, as similar incidents occurred across Jeju at the time; and (3) peaceful resolution was structurally impossible given the irreconcilable positions — the militants opposed separate elections while USAMGIK required their success to legitimize its occupation. This reappraisal complicates the linear narrative of “successful negotiation → Orari sabotage → hardline tur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