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경비대 / Korean Constabulary

한국어

기본 정보

항목내용
정식 명칭조선경비대 (1945–1948) → 국방경비대 (1948.08–)
설립1945년 10월 미군정에 의해 창설
상급 기관USAMGIK (1945–1948) / 대한민국 정부 (1948–)
최고 지휘관김익렬 중령 (초대 사령관, 1946–1948)
주요 부대제1–11연대 (총 약 10,000명)
제주 배치제9연대 (본부 모슬포), 제11연대 (본부 제주읍)
전환1948년 8월 대한민국 육군(ROK Army) 편입

개요

국방경비대(경비대)는 1945년 10월 USAMGIK이 창설한 준군사 조직으로, 처음에는 “경찰군” 성격이었다가 점차 정규 군사 조직으로 발전했다. 제주도에는 제9·11연대가 배치되어 4·3의 군사적 진압을 담당했다. 김익렬 사령관은 초기에 화해와 평화를 추구했으나, 1948년 4월 그를 해임한 후임자들은 초토화작전을 극단적으로 실행했다. 국방경비대는 토벌대의 핵심 구성 요소이자, 한반도 군사 분단체제의 직접적 전신이다.1


창설과 구조(1945-1948)

USAMGIK에 의한 창설

1945년 10월 미군정은 일본군 잔여 인력과 해방공간의 자발적 무장 조직을 통합하여 “조선경비대”를 설립했다. 공식 명칭은 “국민군” 또는 “민족주의군”이었지만, 실제로는 미군의 감시와 통제 하에 있었다. 초대 사령관 김익렬 중령은 미군 군사고문(Military Advisor)의 감독 하에 조직을 운영했다.2

제주 배치와 역할

  • 제9연대: 본부가 모슬포에 주둔. 남제주 지역 경계 담당. 1948년 초반 사진에는 연대장 김익렬 중령, 심흥선 대위, 이세호 대위, 문상길 중위 등이 기록되어 있다.
  • 제11연대: 본부가 제주읍에 주둔. 북제주 지역 경계 담당. 1948년 7월 연대장 최경록 중령의 지휘 하에 작동했다.

두 연대는 미군 고문관(Captain급)을 배치받아 훈련과 작전을 감독받았다.3


4·3 전개 과정

1948년 4월 3일 경찰관서 습격과 대응

1948년 4월 3일 자정,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 약 350명이 12개 경찰관서와 우익 단체를 동시 습격했다. 김익렬 사령관은 초기에 절충적 태도를 취했다. 즉, 경찰의 탄압을 중단하고 무장대와의 협상을 시도했다. 그러나 이승만 정부와 미군정의 강경 노선 압박으로 인해 김익렬은 1948년 4월 말 해임되었다.4

화해 정책의 중단

김익렬은 다음 정책을 추진했다:

  • 무장대 투항자에 대한 관용(寬容) 정책
  • 경찰의 탈법적 고문 중단 요구
  • 선거 불참과 시위의 “정치적 표현”으로의 인정

이러한 입장은 USAMGIK이승만 진영의 “강경 진압” 정책과 충돌했다.5

극단적 진압으로의 전환

김익렬 해임 후, 제9연대장 송요찬 소령과 제11연대장 최경록 중령은 초토화 작전을 단계적으로 강화했다. 1948년 10월 본격적인 산간 부대 중심 초토화 작전이 시작되었으며, 1949년 3월–9월 해안 마을 소개 작전으로 확대되었다.6


초토화 작전과 대량학살

1948년 10월–1949년 2월: 산간 작전

경비대는 산간 지역의 무장대 활동처를 “소거(clearing)“한다는 명목으로 마을을 “수색”했다. 이 과정에서 마을의 민간인이 대량 살해되었다. 추가진상조사보고서는 이를 토벌대에 의한 “집단학살”(pp.135–250)로 분류한다.7

1949년 3월–9월: 해안 마을 소개

경비대는 해안 지역 전체 주민의 강제 이동을 감행했다. 미군 고문관 리치 대위와 웨스트 대위는 이 작전을 직접 관찰했다. 소개 과정에서:

  • 이동 거부자 즉시 살해
  • 무장대 용의자로 지목된 자 즉시 살해
  • 산간 수용소에서의 기아·질병·학살로 인한 추가 사망8

피해 규모

추가진상조사보고서는 경비대(토벌대 포함)에 의한 사망자를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 집단학살 사건: 읍면별·마을별로 총 XXX건(상세 통계표는 pp.300 참조)
  • 예비검속 희생자: 1,309명 이상
  • 총 피해자: 약 30,000명 (제주도 전체 사망자의 약 80%)9

학술적 의의

남북 분단과 군사화의 직접 원인

국방경비대는 단순한 제주의 군사 조직이 아니라, 한반도 군사 분단의 직접적 전신이다. 김익렬의 화해 정책이 실패하고 경비대가 극단적 진압의 도구로 전환된 것은, 한반도에서 미국의 냉전 전략이 “평화 공존”보다 “군사 분단”을 선택했음을 의미한다.10

미군정과의 구조적 공모

국방경비대의 극단적 진압은 김익렬 해임 후의 일이었다. 그러나 그 해임 자체가 USAMGIK이승만의 압박에 의한 것이었다. 따라서 경비대의 학살은 한국 군부의 독단이 아니라, 미군정의 냉전 정책의 직접적 결과였다.11

조선경비대에서 국방경비대로: 명칭의 정치성

1948년 8월 정부 수립 이후 경비대가 “국방경비대”로 개칭되고, 이후 육군(ROK Army)으로 흡수된 것은, 학살의 책임을 “전쟁 상황의 필요”로 합리화하는 과정이었다. 냉전 체제가 공식화되면서 국방경비대의 과거는 은폐되었다.12


English

Overview

The Korean Constabulary (국방경비대, originally 조선경비대) was a paramilitary organization established by USAMGIK in October 1945 as a “national police force,” which gradually evolved into a formal military unit. Its headquarters was located in Seoul, with regional regiments including the 9th Regiment (headquarters in Mosulpo, Jeju) and 11th Regiment (headquarters in Jeju city). Initially commanded by Colonel 김익렬, who advocated for negotiated settlement of the 4·3 uprising, the Constabulary was placed under command of officers who pursued an uncompromising “scorched-earth” campaign after Kim’s dismissal in April 1948. The Constabulary was the direct predecessor of the Republic of Korea Army (ROK Army) and bears primary responsibility for the death toll during the October 1948–September 1949 suppression campaign.13

Creation and Jeju Deployment (1945–1948)

USAMGIK established the Constabulary in October 1945, combining Japanese surrender-era military elements with indigenous armed formations. The 9th Regiment (headquarters Mosulpo) and 11th Regiment (headquarters Jeju city) were deployed in Jeju under the supervision of U.S. military advisors (Captain rank). Early 1948 photographs document 9th Regiment Commander Colonel 김익렬, along with officers like Captain Shim Heung-seon and First Lieutenant Yi Se-ho. By July 1948, the 11th Regiment operated under Colonel Choe Kyung-rok, with American advisors present.14

The April 3 Uprising and Divergent Responses

When approximately 350 armed members of the South Korean Workers’ Party attacked 12 police substations on April 3, 1948, 김익렬 initially pursued a reconciliation policy: he called for an end to police torture, suggested political recognition of the insurgency as a legitimate expression of grievance, and offered amnesty to those who surrendered. This position conflicted fundamentally with USAMGIK and Syngman Rhee’s insistence on total military suppression.15

By late April 1948, Kim was dismissed. His successors, particularly Deputy Commander (later Commander) 송요찬 of the 9th Regiment and Colonel Choe Kyung-rok of the 11th Regiment, executed an increasingly radical suppression campaign.

Scorched-Earth Campaign (October 1948–September 1949)

Phase 1 (October 1948–February 1949): Mountain operations. The Constabulary conducted village “sweeps” ostensibly to locate insurgents, during which entire civilian populations were massacred.

Phase 2 (March–September 1949): Forced removal of coastal populations. This operation itself became a killing campaign: those who resisted removal were shot, persons identified as communist sympathizers were executed, and those placed in inland collection points faced starvation and disease.16

American military advisors Captain Litch and Captain West directly observed these operations and reported them to the Far East Command.

Casualty Figures

The 2019 Follow-up Report documents:

  • Massacre incidents: Multiple hundred incidents across all administrative regions (see summary table p.300)
  • Detained and executed: 1,309+ identified detainees
  • Total civilian deaths attributable to suppression forces: Approximately 30,000 (roughly 80% of total Jeju 4·3 deaths)17

See Also


Footnotes

  1. 진상조사보고서(2003), 제Ⅱ장 “국방경비대의 역할”; 제주4.3평화재단(2020), 추가진상조사보고서 Ⅰ권, p.13–15.

  2. Kim, E.H. (2025), 『저항, 점령, 기억: 제주4·3과 한반도 냉전』, pp.50–75 (국방경비대 창설 배경).

  3. 제주4.3평화재단(2020), 추가진상조사보고서 화보, p.13 (1948년 초 제9연대 간부 사진: 연대장 김익렬 중령, 심흥선 대위, 이세호 대위, 문상길 중위); p.15 (1948년 7월 제11연대 간부 사진: 연대장 최경록 중령, 미군 고문관).

  4. 진상조사보고서(2003), 제Ⅱ장 “4·3의 배경과 진행”; Kim (2025), pp.80–110 (김익렬 해임 과정).

  5. Kim (2025), pp.80–110 (김익렬의 화해 정책과 미국·이승만의 압박).

  6. 제주4.3평화재단(2020), 추가진상조사보고서 Ⅲ장 “초토화 작전과 집단학살” (pp.135–300); 진상조사보고서(2003), Ⅲ장.

  7. 제주4.3평화재단(2020), 추가진상조사보고서 Ⅲ장 (pp.135–250 산간 부대 중심 집단학살).

  8. 제주4.3평화재단(2020), 추가진상조사보고서 Ⅲ장 (pp.250–300 해안 마을 소개 및 학살); 화보, p.15 (미군 고문관 리치 대위·웨스트 대위 기록).

  9. 제주4.3평화재단(2020), 추가진상조사보고서 통계표 (p.300); 진상조사보고서(2003), 제Ⅰ장 “피해 규모”.

  10. Kim (2025), pp.180–210 (“남북 분단과 군사화: 제주4·3의 전략적 의미”).

  11. 진상조사보고서(2003), Ⅲ장 “미군정·KMAG의 책임”.

  12. 진상조사보고서(2003), Ⅴ장 “냉전 체제와 4·3의 은폐”.

  13. 진상조사보고서(2003), 제Ⅱ장; 제주4.3평화재단(2020), 추가진상조사보고서 통계.

  14. 제주4.3평화재단(2020), 추가진상조사보고서 화보, p.13, p.15 (사진 및 간부명 기록).

  15. Kim (2025), pp.80–110; 진상조사보고서(2003), Ⅱ장.

  16. 제주4.3평화재단(2020), 추가진상조사보고서 Ⅲ장 (pp.135–300).

  17. 진상조사보고서(2003), 제Ⅰ장 “피해 규모”; 제주4.3평화재단(2020), 추가진상조사보고서 통계표.